외부적 인간
요즘 완전 꽂혀 천착하고 있는 대만 밴드. '낙일비차'라는 한문명도 매우 마음에 든다.대만에 가보고 싶다.
육각(六角)의 방 이 방 속에나는 덜 익은 꿀처럼 담겨 있다문이 열리면 후루룩 흘러내릴 것처럼 이 방 옆에또다른 방들이 붙어 있다는 게 마음 놓인다켜켜이 쌓인 六角의 방들을고통이 들락거리며 매만지고 간다 이 방은군집할 수 있는 최적의 각도와고립할 수 있는 최적의 넓이를 지녔다 내 어깨를 쏘았던 말벌은침을 잃었고 나는침을 삼키고 오래 앉아 있다 땅 위에 으깨진 말벌집,검은 물결무늬를 지닌 한 세계가 출렁거리고六角의 방에서애벌레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꿀은 아직 익지 않았다 나희덕, 『야생사과』, 창비시선, 2009, p. 40-41
발 없는 새 청춘은 다 고아지. 새벽이슬을 맞고 허공에 얼굴을 묻을 때 바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지.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이제 우리 무엇을 할까.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청춘은 다 고아지. 도착하지 않은 바람처럼 떠돌아다니지. 나는 발 없는 새. 불꽃 같은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옷깃에서 떨어진 단추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난 사라진 단춧구멍 같은 너를 생각하지. 작은 구멍으로만 들락날락거리는 바람처럼 네게로 갔다 내게로 돌아오지. 우리는 한없이 둥글고 한없이 부풀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 질감 없이 부피 없이 자꾸만 날아오르려고 하지. 구체성이 결여된 삶에도 사각의 모퉁이는 허용될까. 나는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해. 각진 곳이 필요해. 널브러진 채로 몸을 접을 만한 ..
가을은 너무 쓸쓸해서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 사이는 조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던 더위가 한 걸음쯤 물러서고 선선한 밤공기가 나를 감쌀 때. 이유 없이 해질녘 한강에 가서 저 끝에서부터 서서히 하나씩 켜지기 시작하는 가로등을 바라보고 싶을 때.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목적지도 없이 헤매면서 한없이 걷고 싶을 때. 혜화에서부터 동대문을 넘어 을지로 일대까지 걸었던 날이 있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유독 그날 신은 신발은 불편했고 집에 돌아오니 발이 퉁퉁 부었는데,높은 굽의 신발을 벗고 현관을 딛으니 푹신한 느낌이 드는 게 신기해서 현관 앞을 뱅글뱅글 돌며 또 걸었다. 이 무렵이면 이 노래가 생각난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또 새로운 하루가..
마네킹 바람이 바람을 넘쳐 플래카드를 흔들고잎 넓은 나무가 잎 넓은 나무를 넘쳐 푸르른 날 나는 경건하였다.나는 불순한 상상을 하지 않았다.나는 완벽하게 나를 조절하였다.그러므로 당신은 나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당신이 바라볼 때마다나의 침묵은 부활한다.나의 시선은 이미완성되어 있다. 격렬한 밤이 당신을 지나갈 때도나는 기하학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내 시선 끝에 서 있는 대우아파트나는 그의 정지 자세를 이해한다.피고 지는 것들은 지겨워.나는 서서히 낡아갈 것이며나의 최후는 단호하다. 플래카드 아래로 당신이 당신을 넘치며 걸어온다.당신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와 긴 그림자를 이룰 때잠시 공중에 머물렀던 낙엽이당신의 배후를 횡단한다.당신은 혼자 고개를 흔든다.나는 당신이 지겹다.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