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scrap (45)
외부적 인간
로비 이곳은 로비다. 그들은 로비에 마주앉아 있다. 로비에는 약간의 음악이 흐르고, 그들은 약간의 음악이라는 표현이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완전히 틀리지도 않은. 로비는 분주하지만 고요하다. 음악은 그들이 평소에 좋아하던 아티스트의 리믹스 앨범 수록곡이고. 나무가 흔들려서 슬픈 것 같다고 한 사람이 중얼거린다. 그는 우리가 같은 계절을 지나는 것이라면, 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생각했지만 로비에 흐르는 음악의 제목은 다른 것이다. 모든 음악은 리믹스지, 라고 누군가 생각하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로비로 들어왔고 비가 내리면 안과 밖의 경계가 선명해졌다. 그들은 이제 창밖의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 마주앉은 사람도, 나무가 흔들려서 정말로 슬퍼 보이네, 중얼..
살아남기 위한 기도 A Litany for Survival 중대하면서도 홀로 내려야 할 결단의 벼랑 끝에 언제나 선 채 물가에서 살아가는 우리 중 몇몇을 위해 선택이라는 잠깐의 꿈조차도 마음껏 누릴 수 없는 우리 중 몇몇을 위해 우리 아이들의 꿈이 우리의 죽음을 닮아 가지 않도록 아이들의 입에 넣어 줄 빵과 같은 미래들을 길러 낼 단 하나의 지금을 찾아 안팎을 살피고 전후를 보느라 새벽 사이의 시간대에 문간을 드나들면서 사랑하는 우리 중 몇몇을 위해 우리 어머니의 젖과 함께 두려움을 배우는 이마 한가운데 새겨진 흐릿한 선처럼 공포를 각인받은 우리 중 몇몇을 위해 조금의 안전이라도 찾으리라는 이 환상이라는 무기로 발걸음이 무거운 자들이 우리가 침묵하기 바랐으므로 우리 모두에게 있어 이 순간과 이 승리에 이..
질의응답 정면에서 찍은 거울 안에 아무도 없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 버티다가 울었던 완벽한 여름 어떤 기억력은 슬픈 것에만 작동한다 슬픔 같은 건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 어째서 침묵은 검고, 낮고 깊은 목소리일까 심해의 끝까지 가닿은 문 같다 아직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이 났다 안미옥, 『온』, 창비시선, 2017, p. 38
캔들 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징그럽고 다정한 인사 희고 희다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안미옥, 『온』, 창비시선, 2017, p. 24-25
밤의 거리에서 혼자 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길고 좁고 어두운 길에 사람이 엉켜 있었다 포옹인지 클린치인지 알 수 없었다 둘러 갈 길 없었다 나는 이어폰 빼고 발소리를 죽였다 팔꿈치를 벽에 대고 한 사람이 울기 시작했다 야 너무하잖아 지나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자 누구 말이 맞는지 가려보자며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멈칫 둘러보니 행인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난 긴장하며 고개 숙여 기다렸다 이 순간 내가 저들의 생에 중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나 보다 원투 스트레이트 촌각의 글러브가 심장을 쳤다 가로등 밑에서 편지를 읽던 밤이 떠올랐다 달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렇게 씌어 있던 우린 이어지지 않았다 그 젊은 연인들은 나한테 접근하다가 둘의 그림자만 거죽처럼 흘리고 갔다 얘들아 나도 불가피하게 사람인데 너무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