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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적 인간
단어 빛이 떨어지고 빈 병이 있던 바닥에거기 있다는 것을 본 것만 같은데 그저 그랬을 뿐 나는흔적처럼 남아 있는 온기를 쓸어보았고먼지처럼 작은 것들 묻어났다 알고 있었으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었다잠에서 깨었을 때 사라진 당신은당신 아닌 것들만 남아 당신이 되었고 나는 아주 작고 아득한 단어를 날리고세어본 것이다 쓸 수도 발음할 수도 없는단어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것은날아가버렸고 도저히 돌아올 수 없으니 유희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사, 2018, p. 54 오랜만에 페이지마다 발췌하고 싶은 것을 참은 시집.하나만 발췌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시집은 참으로 오랜만이다.시인의 말도 남겨둔다. 시인의 말 나타나지도 않았고사라지지..
밑 이제 그만 혹은 이제 더는 이라고 말할 때 당신 가슴에도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그랬을까. 수면처럼 흔들리던 날들이 가라앉지도 못하고 떠다닐 때 반쯤 죽은 몸으로 도시를 걸어보았을까. 다 거짓말 같은 세상의 골목들을 더는 사랑할 수 없었을 때 미안하다고 내리는 빗방울들을 보았을까. 내리는 모든 것들이 오직 한 방향이라서 식탁에 엎드려 울었던가. 빈자리들이 많아서 또 울었을까. 미안해서 혼자 밥을 먹고, 미안해서 공을 뻥뻥 차고, 미안해서 신발을 보며 잠들었을까. 이제 뭐를 더 내려놓으라는 거냐고 나처럼 욕을 했을까. 우리는 다시 떠오르지 않기 위해 서로를 축복해야 한다. 더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손들을 늦지 않았다고 물속에 넣어보는 것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별들로 반짝여보는 것이다. 이승희, 『..
서울 사람이 어깨만이 돼서 거리에 넘친다버스 기사님이 어깨만이 돼서 우리를 싣고 달린다연인들이 어깨만이 돼서 타박타박 걸어간다 이 거리는 어깨만으로 남아 서 있다 사람들이 어깨만이 돼서 부딪쳐 간다버스 기사님이 어깨만이 돼서 우리를 버리러 달려간다연인들이 어깨만이 돼서 넘어져 간다 이 거리는 어깨만 남아 짖는다어깨 너머 잊힌 달이 헐떡거린다 이 어깨에는 그림자가 없다 사이토 마리코, 『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 책 세계시인선II, 2018, p.28 일본 시인이 외국어인 한국어로 쓴 두 번째 시집.첫번째 시집 『입국』은 절판인데다 찾기도 힘들어 볼 수 없었다. 읽어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이 시집이 한국어로 쓴 마지막 시집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거라고.외국인이 한국어를 다루는 방식에서 묘한..
이 세상에서 위안을 찾을 방법은 많지 않다. 아무리 어둡고 역겨운 곳이라도 거기에 위안이 있다면 누려야 한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귀하가 나를 존재하게 하도록 허락합니다’라는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기들이란 부모가 자기만으로는 만족을 못해서 낳는 것 아닌가. 그러니, 부모님들, 우리가 실존적 구멍을 채우려 한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말아주시길. 여러분이 자기 구멍을 채우려다가 실패해서 생긴 게 바로 우리니까. 우리가 여기서 공허와 씨름하는 건 애초에 다 여러분 탓이다. (p.16) 당신이 외로운 상태로 낯선 데서 의식을 잃으면 또 다른 외로운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고 싶은 짓을 마음대로 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그걸 자유연애라고 부른다. (p.26) 나는 너를 사랑하고..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 타자(他者)가, 세계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절반만 진실이다. 세계가 '나'에게 온 그 순간, '나' 역시 이 세계에 왔다. 이 세계와 공집합을 합집합으로 가졌으나 명확히 상동관계는 아닌, 무언가 낯선 것으로서. 내가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역시, 이제까지 없었던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는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무언가 유해할지도 모르는 것을 흘리고 다닌다. 기억하지 못하는 형태로, 그 흔적은 어쩌면 내 안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지나온 자리들의 어떤 이미지, 소리, 색깔, 향기 들. 그리고 누적되는 저장물들의 거듭되는 양질전화. 그것을 담아두는 용기. 특정 모양의 용기─나, 타자. 무엇인가가 이질적인 '나'로 하여금 그만큼이나 이질적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