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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적 인간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지난겨울 죽은 나무를 버린 적이 있었다. 마른 뿌리를 흙에 파묻고서 나무의 본분대로 세워두었는데. 지난겨울 그렇게 버려지면 좋았을 내가 남몰래 조금씩 미쳐갔다. 남몰래 조금만 미쳐보았다. 머리카락이 타오르는 걸 거울 속으로 지켜보았고 타오르는 소리를 조용히 음미했다. 마음에 들었다. 실컷 울 수도 실컷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끝까지 울어보았고 끝까지 웃어보았다. 너무 좋았다. 양지에 앉아 있었을 때 웅크린 어느 젊은이에게 왜 너는 울지도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젊은이의 눈매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더라. 그건 분명 돌멩이였다. 우는 돌을 본 거야. 그는 외쳤어. 미칠 것 같다고! 외치는 돌을 본 거야. 그는 더 ..
우주 바깥에서 추위가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꼭 이런 방식이어야 할까. 외계인에게 손가락이 주어진다면 다른 생물에게 온도를 전달하며 생명을 유지하게 될까. 뜨거운 열역학적 죽음들 사이로 시간이 흐른다. 어둠이 완벽하게 얼어붙어 있다. 나의 호흡이 매 순간 사라질 것만 같다.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서의 나 손아귀 속의 따뜻함은 너와 나의 삶을 손상시키지 않고 이곳 건너편의 이곳으로 옮겨 갈 수 있을까. 상처난 아이의 발가락이 조개껍데기 안에 담기듯이. 하재연, 『우주적인 안녕』, 문학과지성사, 2019, p. 88-89
밀크 캬라멜 나랑 그 애랑 어둠처럼 햇빛이 쏟아지는 스탠드에 걸터앉아서 맨다리가 간지러웠다 달콤한 게 좋은데 왜 금방 녹아 없어질까 이어달리기는 아슬아슬하지 누군가는 반드시 넘어지기 마련이야 혀는 뜨겁고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운 것 부스럭거리는 마음의 귀퉁이가 배어 들어가는 땀으로 젖을 때 손바닥이 사라지기를 기도하면서 여름처럼 기울어지는 어깨를 그 애랑 맞대고서 맞대고 나서도 기울어지면서 하재연, 『우주적인 안녕』, 문학과지성사, 2019, p. 70-71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핏줄들도 버리려고 할 때비극의 끝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아서 센티멘털누구에 의해서든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아닌 건 아니고 누추하지만살면서 어떤 바닥이 제대로 절정이 되어줄 수 있겠는가몇 번이나 응원이 더 필요한 계절을 지나올 때도오늘의 바닥에 닿지는 못했다여분을 믿는 것처럼 주머니를 뒤집었다 이르고 도달해 나를 다 즈려밟고 지나가야 할 길누구에 의해서든 압축되어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사람을 위한 과일이라기보다는 새들을 위한 열매인 듯하늘 바로 밑에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노란 모과를 보았을 때주인인 줄 알고 살았던 나의 생生에객客으로 초대받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하면서불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서또,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로부터 체온을 나눠 받는 혹한이다 다 쓰고 씌어지고 버려질 나는 아름답고버려..
목련 뭐 해요?없는 길 보고 있어요 그럼 눈이 많이 시리겠어요예, 눈이 시려설랑 없는 세계가 보일 지경이에요 없는 세계는 없고 그 뒤안에는나비들이 장만한 한 보따리 날개의 안개만 남았네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길도 나비 날개의 안개 속으로 그 보따리 속으로 사라져버렸네요 한데낮달의 말은 마음에 걸려 있어요흰 손 위로 고여든 분홍의 고요 같아요 하냥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어요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예, 하지만 아직 본 적 없는 눈동자 같아서이 절정의 오후는 떨리면서 칼이 되어가네요 뭐 해요?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목련, 가네요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p. 50-51"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