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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적 인간
마지막은 왼손으로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
l 작가노트 l 일인칭들 부끄러웠던 일이 떠오르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이런 게 나름 도움이 되는 날도 있지 않겠나 기대하는데 예를 들어 낯선 곳에 고립되어 구조를 기다려야 할 때, 여기서 잠들면 다 끝장일 것 같은 그런 순간에, 살아남는 방법 하나를 내가 알고 있는 셈이다. 지나고 나면 자꾸 후회하는 것들이 생겨서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결국에는 돌고 돌아 지금의 내가 다시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전혀 다른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아마 그때도 여전히 비슷하게 후회하고 다른 쪽을 상상하며 아쉽고 아까운 것들, 놓치고 멀어진 것들에 대해 그리워하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로 존재했다가 그 중 가장 낮은..
지금 지금 말하라.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 예전에 말하던 것도 달라진다. 지금 말하라.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말하고 왜 말하는지. 이유도 경위도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은 기준이다. 지금이 변하고 있다. 변하기 전에 말하라. 변하면서 말하고 변한 다음에도 말하라.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하라. 지나가기 전에 말하라. 한순간이라도 말하라. 지금은 변한다. 지금이 절대적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이 되어버린 지금이. 지금이 될 수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그 순간이다. 지금은 이 순간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 말하라. 김언, 『한 문장』, 문학과지성사, 2018, p. 9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첫 시이고, 방금 펴들었는데 첫 시를 읽자마자 압도 당했다. 그래서 옮겨둔다.
빛에게 빛이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빛은 왔어균열이 드러났고균열 속에서 빛은 괴로워했어저로 인해 드러난 상처가싫었던 거지빛은 썩고 농한 것들만찾아 다녔어아무도 빛을 묶어둘 수 없고아무도 그 몸부림 잠재울 수 없었어지쳐 허기진 빛은울다 잠든 것들의 눈에 침을 박고,고여 있던 눈물을 빨아 먹었어누구라도 대신해울고 싶었던 거지,아무도 그 잠 깨워줄 수 없고아무도 그 목숨거두어줄 수 없었으니까언젠가 그 눈물 마르면빛은 돌아가겠지,아무도 죽지 않고다시 태어나지 않는 곳,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다시는 죽지 않는 곳,그런 곳에 빛이 있을까 이성복, 『래여래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p. 77-78 우연하게 다시 이 시집을 펼쳐볼 일이 있었는데 과거의 내가 마크를 해두었길래 여기에도 스크랩을 한다.이 책은 201..
장애가 있는 많은 개인에게,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정당한 권리를 수호하는 것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공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중요하다. 폴란은 애초에 모두가 식탁까지 갈 수 있다고 전제한다. 나는 내가 이야기할 청중을 바라보고 이 식탁까지 오지 못한 존재들을 생각했다. 동물 윤리와 지속 가능성에 대한 담론에서 장애, 인종, 젠더, 혹은 소득 때문에 지워지는 존재들. 사프란 포어는 자신의 저서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Eating Animals”에서 간단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사회적으로 편안한 상황을 만드는 것,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각각 얼마만큼 중요시하는가?” (…) 나는 어떻게 동물이 장애 차별적인 인간 특성과 능력을 기준으로 판단 당하는지도 이야기했다.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