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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적 인간
IV. 유럽의 심장11. 사령관배우의 비애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나? 이제는 무슨 얘기인지 알겠지. 막이 내리고 갑자기 말과 표정으로 된 이 모든 세계, 이 모든 세계가 사라져 버리네. 막이 내리면 배우한테는 아무것도 안 남지. (침묵) 배우가 못을 박고 있지. 갑자기 막이 내리고. 그러면 깨닫게 되는 거야. 그러면 갑자기, 뭔가 끔찍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배우가 못을 박고 있을 때, 못을 박고 있지만, 그건 동시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야. (침묵) 막이 내리고 배우는 손에 망치를 들고 있어. 그 망치로 뭘 해야 할지 몰라. (침묵) 막이 내리고 배우는 삶으로 돌아오지. 그런데 삶이 항상 달콤한 게 아니라는 거 자네도 나처럼 잘 알 걸세, 삶이 항상 달콤한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토요일 친구야 너는 육손이었지친구들에게여섯 번째 손가락이 있던 자리를 보여줄 때나는 너의 흉터가 부러웠어 친구들의 눈동자와여섯 번째 상상력과 기차를 타면 자꾸만 풍경이 지나간다풍경은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다는 것을알았을 때 귀밑에서 손가락이 만져졌지 친구야 너는 토요일에 죽었지다른 친구들의 눈동자가너의 사인을 자살이라고 적을 때나는 추락사라고 쓰고 있다 어떤 책에는 신이 인간을여섯 번째 날에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여섯 번째 날에 태어난 사람들이 자꾸 돌아다닌다지나가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신의 손가락 개수가 궁금했었어그건 쓰여있지 않아서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가 육손이였으면 좋겠다여섯 번째 날에 세어볼 수 있게 너처럼 잘라버렸다면상상으로라도 아플 수 있게 네가 잘라버린 손가락을 무의미라고 부를 때나는 ..
검은 홍합 검은 냄비 속에 검은 홍합이 가득하다켜켜로 쌓인 홍합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홍합과 홍합의 틈바구니에소리가 묻혔다 냄비에는 찬물이 들어 있고홍합은 바다에서 왔다 한 번도 물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한 번도 물에 빠져본 적이 없어요 옷을 입고 가스 불에 올려졌다불꽃은 새파랗고 추워저절로 부딪히던 이를 넣고 입이 닫혔다무서워 파도를 입고 입고 입고단단해졌다 갇혔다 물이 들어오지 않게 붙지 않는 입을 꽉 다물고 있던 것가라앉지 않기 위해 끝까지 주먹을 풀지 않았던 것 홍합이 덜그럭거리며 끓어올랐다딱딱 이를 부딪치듯이 여기는 아직도 구겨진 벽거품이 넘친다 냄비 뚜껑이 열린다 어린 손목이 알고 있는 시계는 어디에서 멈췄을까 홍합이 벌어지고 있다선홍색 잇몸이 보인다 이원, 『사랑은 탄생하라』, 문학과지성사, ..
때로 가로등 불빛 아래 그들이 보인다. 그들은 알 수 없는 몽상에 잠겨, 푸른 물웅덩이 위를 떠다니며, 꼼짝도 않고, 조금 취한 듯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들뿐이라고 느끼며, 서로를 바라보지 않게 된다면 어디에 눈길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채, 서로 끌어안고 한참을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청록빛 어둠에 에워싸여 모든 것을 잊고 자신도 잊은 채, 사랑의 심연을 표류한다. 미지근하고 들척지근한 땀 송송 배어나는 심장을 셔츠 아래 감추고,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터무니없이 작게 보이기도 하는 그 거대한 푸르름에 빠져. 기차가 출발하려 할 때면, 그들은 부두에 남아 있는 이들을 향해 창 너머로 살며시 손 흔들어 보인다. 하고픈 말들로 한껏 부풀어오른 두 눈으로, 사랑 어린 눈길로 그들을 바라본다..
아침밥 나는 죽은 사람들이 좋다. 죽은 사람들이 괜히 좋아지는 것도 병이라면 병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의 수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수가 더 많으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찌되었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보다 먼저 죽은 사람들과 모두 함께 다시 태어나고 싶다. 대신 이번에는 내가 먼저 죽고 싶다. 내가 먼저 죽어서 그들 때문에 슬퍼했던 마음들을 되갚아주고 싶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눈물을 참다가 더운 육개장에 소주를 마시고 진미채에 맥주를 마시고 허정허정 집으로 들어가는 기분, 그리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터져나오던 눈물을 그들에게도 되돌려주고 싶다. 그렇게 울다가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난 아침, 부은 눈과 여전히 아픈 마음과 입맛은 없지만 그래도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