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적 인간
정한아,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 본문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
타자(他者)가, 세계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절반만 진실이다. 세계가 '나'에게 온 그 순간, '나' 역시 이 세계에 왔다. 이 세계와 공집합을 합집합으로 가졌으나 명확히 상동관계는 아닌, 무언가 낯선 것으로서. 내가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역시, 이제까지 없었던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는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무언가 유해할지도 모르는 것을 흘리고 다닌다. 기억하지 못하는 형태로, 그 흔적은 어쩌면 내 안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지나온 자리들의 어떤 이미지, 소리, 색깔, 향기 들. 그리고 누적되는 저장물들의 거듭되는 양질전화. 그것을 담아두는 용기. 특정 모양의 용기─나, 타자.
무엇인가가 이질적인 '나'로 하여금 그만큼이나 이질적인 '당신'을 만나도록 이끌어왔다. 그때, 눈앞에 있는 당신의 얼굴은 세계의 얼굴이 된다. 우연과 필연이 서로를 혼동한다. 그리고,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 마치 처음 일어나는 일처럼. 모든 과거가, 모든 미래가, 모든 가능한 일이, 오늘, 여기에서, 지금, 벌어진다. 그 무시무시한 엄습 앞에서 누가 떨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예감과 기억이 동의어가 된다.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기억마저 된다. 그 기억마저 예감했다고 가정된다.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실감은 이 모든 것을 함축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그것을 두려움 속에 받아적는다. 그것은 역사, 일종의 역사이겠지. '나-타자'와 또다른 '나-타자'인 당신 사이에서, 그러니까 한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에서, 동시에 그 모든 '나-타자'들 안에서 일어나는 세계사이겠지. 세계가 누락한 세계사이겠지. 그 세계는, '이것은 책상이다'나 '당신을 사랑합니다'만큼 불확정적이며, 무슨 설(說)과 론(論)도 없고, 찰나 속에 부정과 긍정을, 구축과 해체를 반복하며, 자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그 세계는 이 세계에, 당신들의 얼굴에 겹쳐져 있다. 우리가 잠꼬대를 할 때, 사랑에 취해 속삭일 때, 우리는 그 세계의 정거장에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이다. 속속 도착하는 사람들의 기적 소리로 충만한 정거장에.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
문학동네시인선 기념 자선 시집 『영원한 귓속말』, 정한아 자선시 「론 울프 씨의 혹한」 덧글, 2017, p. 47-48
서울 연극센터에 들를 일이 있어서 앉아있다가 이 시집을 읽었다.
어쩐지 남성 시인들의 시들은 전부 '여자', '아내', '어머니', '그녀' 등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참으로 죄송하게도, 남성 시인의 시들은 다 넘겼다. 그러다 정한아의 자선시에 멈췄고 그 뒤의 덧글에 멈췄다.
좋은 시들이 많았지만 덧글이 더 좋은 경우가 더러 있었다. 개중 특히나 이 글은 꼭 옮겨두고 싶었다.
늦게나마 정한아 시인의 시집을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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