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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적 인간
육각(六角)의 방 이 방 속에나는 덜 익은 꿀처럼 담겨 있다문이 열리면 후루룩 흘러내릴 것처럼 이 방 옆에또다른 방들이 붙어 있다는 게 마음 놓인다켜켜이 쌓인 六角의 방들을고통이 들락거리며 매만지고 간다 이 방은군집할 수 있는 최적의 각도와고립할 수 있는 최적의 넓이를 지녔다 내 어깨를 쏘았던 말벌은침을 잃었고 나는침을 삼키고 오래 앉아 있다 땅 위에 으깨진 말벌집,검은 물결무늬를 지닌 한 세계가 출렁거리고六角의 방에서애벌레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꿀은 아직 익지 않았다 나희덕, 『야생사과』, 창비시선, 2009, p. 40-41
발 없는 새 청춘은 다 고아지. 새벽이슬을 맞고 허공에 얼굴을 묻을 때 바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지.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이제 우리 무엇을 할까.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청춘은 다 고아지. 도착하지 않은 바람처럼 떠돌아다니지. 나는 발 없는 새. 불꽃 같은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옷깃에서 떨어진 단추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난 사라진 단춧구멍 같은 너를 생각하지. 작은 구멍으로만 들락날락거리는 바람처럼 네게로 갔다 내게로 돌아오지. 우리는 한없이 둥글고 한없이 부풀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 질감 없이 부피 없이 자꾸만 날아오르려고 하지. 구체성이 결여된 삶에도 사각의 모퉁이는 허용될까. 나는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해. 각진 곳이 필요해. 널브러진 채로 몸을 접을 만한 ..
마네킹 바람이 바람을 넘쳐 플래카드를 흔들고잎 넓은 나무가 잎 넓은 나무를 넘쳐 푸르른 날 나는 경건하였다.나는 불순한 상상을 하지 않았다.나는 완벽하게 나를 조절하였다.그러므로 당신은 나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당신이 바라볼 때마다나의 침묵은 부활한다.나의 시선은 이미완성되어 있다. 격렬한 밤이 당신을 지나갈 때도나는 기하학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내 시선 끝에 서 있는 대우아파트나는 그의 정지 자세를 이해한다.피고 지는 것들은 지겨워.나는 서서히 낡아갈 것이며나의 최후는 단호하다. 플래카드 아래로 당신이 당신을 넘치며 걸어온다.당신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와 긴 그림자를 이룰 때잠시 공중에 머물렀던 낙엽이당신의 배후를 횡단한다.당신은 혼자 고개를 흔든다.나는 당신이 지겹다.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
서 나라고 하는 현상은가정된 유기 교류 전등의하나의 푸른 조명입니다 (온갖 투명한 유령의 복합체)풍경과 다른 모든 것과 함께조조히 명멸하며잇달아 또렷이 불을 밝히는인과 교류 전등의하나의 푸른 조명입니다 (빛은 변함없으되 전등은 사라져) 이 시들은 스물두 달이라는과거로 감지된 방향으로부터종이와 광물질 잉크를 엮어 (전부 나와 함께 명멸하고 모두가 동시에 느끼는 것)지금까지 이어온빛과 그림자 한 토막씩을그대로 펼쳐놓은 심상 스케치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과 은하와 아수라와 성계는우주진을 먹고 공기나 소금물을 호흡하며저마다 신선한 존재론을 고민하겠지만그 또한 각자의 마음에 비친 하나의 풍물입니다다만 명확한 기록으로 남은 이들 풍경은기록된 모습 그대로의 풍경이며그것이 허무하다면 허무 자체가 그러하니어느 정도는 모두..
나는거리에서 산다 우리 인간에게 뿌리가 있었던 적이 있는가 사실대로 말하자.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뿌리란 없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그러나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인간인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뿌리라는 것은 욕망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욕망하는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사람들은 그렇게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뿌리가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두 다리로 지상에서 걸어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나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뿌리에 관한 욕망 속에서 산다면, 나는 뿌리에 관한 욕망을 지워 버린 욕망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