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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서 본문

scrap

미야자와 겐지, 서

이제나 2018. 8. 3. 15:42


나라고 하는 현상은

가정된 유기 교류 전등의

하나의 푸른 조명입니다

  (온갖 투명한 유령의 복합체)

풍경과 다른 모든 것과 함께

조조히 명멸하며

잇달아 또렷이 불을 밝히는

인과 교류 전등의

하나의 푸른 조명입니다

  (빛은 변함없으되   전등은 사라져)


이 시들은 스물두 달이라는

과거로 감지된 방향으로부터

종이와 광물질 잉크를 엮어

  (전부 나와 함께 명멸하고

  모두가 동시에 느끼는 것)

지금까지 이어온

빛과 그림자 한 토막씩을

그대로 펼쳐놓은 심상 스케치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과 은하와 아수라와 성계는

우주진을 먹고   공기나 소금물을 호흡하며

저마다 신선한 존재론을 고민하겠지만

그 또한 각자의 마음에 비친 하나의 풍물입니다

다만 명확한 기록으로 남은 이들 풍경은

기록된 모습 그대로의 풍경이며

그것이 허무하다면 허무 자체가 그러하니

어느 정도는 모두에게 공통될 것입니다

  (전부가 내 안의 모두이듯이

  모두 안에 제각기 전부가 있으므로)


그러나 이들 신생대 충적세의

밝고 거대한 시간의 집적 속에서

마땅히 바로 그려졌을 이들 언어가

점 하나에도 균등한 명암 가운데

        (어쩌면 아수라에게는 십억 년의 시간)

어느 틈엔가 구조와 체질을 바꿔

심지어 나나 인쇄공조차

그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는 일도

경향으로서는 가능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감각기관과

풍경과 인물을 느끼듯

그저 그렇게 느낄 뿐이듯

기록과 역사     혹은 지구의 변천사도

각종 데이터와 함께

  (인과라는 시공간적 제약 아래)

우리가 느끼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쯤 흐른 뒤에는

꽤나 달라진 지질학이 통용되고

합당한 증거 또한 과거로부터 차차 드러나

모두가 이천 년 정도 전에는

창공 가득 무색의 공작새가 있었다 여기며

신진 학자들은 대기권의 최상층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음 질소 부근에서

멋들어진 화석을 발굴하거나

백악기 사암층에서

투명한 인류의 거대한 발자국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명제는

심상과 시간 자체의 성질로서

사차원 연장 내에서 주장됩니다


1924년 1월 20일

미야자와 겐지


미야자와 겐지, 『봄과 아수라』, 정수윤 옮김, 읻다 출판사, 2018, p. 13-15


'나라고 하는 현상은/가정된 유기 교류 전등의/하나의 푸른 조명입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웹을 돌아다니다 이 문장을 일본어로 처음 접했었다.

일본어 지식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몇은 일본어로, 몇은 또 한자로 뜻을 파악했었는데 

저 문장을 제외한 나머지 문장들은 한자도 너무 어렵고 해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웹을 벗어났던 기억이 있다.

그랬는데도 어쩐지 저 문장이 잊혀지지 않았다. 게다가 제목이 春と修羅, 봄과 아수라라고 해서 더더욱. (아니었지만)

봄과 아수라라는 단어가 함께 있는 것이 왜 그렇게 당황스럽고 선뜩하고 뇌리에 박혔는지.

그 후로 미야자와 겐지를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다가, <봄과 아수라>가 새로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고 구입했다.

(솔직히, 미야자와 겐지가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번역되어 옮겨진 전체를 보고 처음보다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다.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나라고 하는 현상은~'이지만.

이것이 '시'가 아니라 '시인의 말' 같은 기능을 하는 글인 것도 처음 알았다. 

시집을 쭉 읽다보면 이상 시인이 떠오른다. 이상이 1931년에 시로 데뷔했으니 24년에 겐지의 시를 보지 않았을까?

내가 시의 계보를 쭉 읊을 정도의 깜냥은 못 돼서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부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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