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적 인간
이원, 나는 거리에서 산다 본문
나는
거리에서 산다
우리 인간에게 뿌리가 있었던 적이 있는가
사실대로 말하자.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뿌리란 없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그러나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인간인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뿌리라는 것은 욕망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욕망하는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사람들은 그렇게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뿌리가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두 다리로 지상에서 걸어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나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뿌리에 관한 욕망 속에서 산다면, 나는 뿌리에 관한 욕망을 지워 버린 욕망 속에 산다고 해도 좋다.
사이보그는 미래의 풍경이기만 한 것인가
우리는 그들을 미래의 풍경 속에서 이야기한다. 애써 그들을 미래의 영역으로 내보내고 있는 우리의 사고 속에는 이미 우리의 몸이 그들의 몸과 연결되고 있다는 불길한 심증이 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와 다르다는 그들은 현재의 우리와 너무 닮아 있다.
우리의 몸은 이미 이 세계의 크고 작은 매뉴얼에 시스템화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스템화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물론 우리를 가동시키는 그 매뉴얼은 인간인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이 지상에 시계란 사물이 사라졌다고 가정해 보자. 보이지도 않는 시간을 나눠 쓰라고 쉴 새 없이 째깍거리는 그것에 프로그래밍되어 있던 우리의 몸은 즉각적으로 혼돈에 빠질 것이다. 자주 나는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기계적이지도 않다고, 호모 사피엔스인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이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읽는다. 당장 사이보그라는 말 속으로 들어가 보라. 이 말 속에는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 우글거리고 있다.
유전자 지도를 완성시킨 인간의 집념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의 몸이 그토록 정교한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반어적 비유가 가능하다면 인간의 몸처럼 정확한 기계도 없다. 또한 이렇게 정확한 기계가 우리의 몸의 현실이라면 인체를 위한 접속 코드가 반드시 피나 눈물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어느 정도 사이보그화되어 있는 인체의 접속 코드로는 알루미늄이나 브론즈가 더 현실적일 수 있다. 비록 그것이 그로데스크한 우리의 자화상일지라도.
꽃은 삶이고 모니터는 삶이 아닌가
꽃을 오브제로 쓴 시는 '삶의 체험이 녹아드는 일상'의 세계이고, 모니터를 오브제로 쓴 시는 '세상과 겉돌고 있는' 세계인가. 그렇다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세상과 겉돌고 있는' 세계인가. 이런 대립적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사고의 중심에는 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지상의 모든 것은 등가이다. 꽃과 모니터도 등가이다. 즉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나'와 '클릭하므로 존재하는 나'는 등가이다. 생각하는 나만이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구분 짓는 세계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불멸의 신화를 꿈꾸는 인류가 끊어진 목숨의 역사 만큼 쌓아 올린 세계이다. 그렇다면 현실을 사는 내가 들여다보고 부딪치고 고민해야 하는 대상이 여기가 아닌 그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여기야말로 가장 치열한 삶의 공간이 아닌가.
모니터가 삶의 공간에 있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이 삶의 공간에 있단 말인가. 쉴 새 없이 클릭하는 우리의 손이 현실이 아니라면 무엇이 내 삶이고 내 성찰이고 내 아픈 뼈란 말인가. 내게는 모니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나를 둘러싼 현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현실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은 속도에 급급할 만큼 허약하지 않다. 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이므로, 우리는 몸의 롤러코스터를 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타고 싸워 보기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느림의 미학은 몸의 롤러코스터를 타 본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오아시스이다.
현실에 닿는 몸의 코드는 모두 다른 것이다. 그것이 전통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코드의 문제이며 흔들리는 나무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 만큼이나 쇼윈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 세계에는 어떤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
내게 돌아갈 집이 있었는가
내게 꽃은 이 지상을 함께 호흡하고 있는 존재이지 싸워나가야 할 대상이 아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빽빽한 이 전자사막의 미로를 나는 몸으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미로를 돌아 나올 때 쓰라고 실을 건네준 공주는 없다. 돌아가야 할 집도 없다. 있는 것은 몸뿐이다. 이곳에서 요즘 내 몸이 아픈 것은 '존재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했기 때문이다. 왜 그 현실을 좀더 구부리고 구기고 자르지 못했을까 하는 것 때문이다. 내가 사는 이 사막에 꽃은 피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출구라고는 죽음밖에 없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영원의 찰나'를 계속 제 몸에 새기는 것이며, 그러나 결코 아프다고 비명 지르지 않는 것이며, 비명은 몸속에 무덤처럼 묻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거리에서 거리로 간다. 돌아갈 집이 없는 자에게 거리는 구원이자 절망이다. 나는 어두워지지 않는 이 사막의 한복판에서 인간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지쳐 모니터 속에 들어가 깜박 잠들기도 한다. 신화 속의 오디세이는 귀향하지만 현실의 오디세이는 귀향하지 못한다. 이 겹겹의 미로를 쉬지 않고 길을 찾아 걸으며 몸에다 길을 새길 뿐이다.
이원, 『최소의 발견』, 민음사, 2017, p. 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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