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scrap (45)
외부적 인간
밝은 성 안개 짙은 날에는 걷기만 했지 죽는 날 듣게 될 음악을 생각하며 웃었어 친구들도 웃었지 맞닿은 어깨들이 빛나 보였어 먼 곳의 도시가 능히 그러듯이 피어오르는 빛을 따라서 안개는 몸을 지우며 길을 펼쳤다 친구들, 안개 속에서 크고 환하며 안개 걷히면 보이지 않는 친구가 없는 내 친구들 사과와 크레용, 장미나 의자 따위 저마다 대수롭지 않은 사물들을 손에 쥐고 그것을 신앙이라 밝히길 두려워 않았던 친구들이 울었어 어두운 도시로 걸었지 지울 몸이 없어 도시로 가는 길도 없는 흑암 속을 걷는 친구들 그곳이 도시인줄 모르던 친구들, 내가 죽은 뒤에도 내 친구들이었던 친구들 신실했고, 저마다 아껴 듣는 음악이 있었던 내 친구들 송승언, 『철과 오크』, 문학과지성사, 2015, p. 98-99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잘 있니? 환각의 리사이클장에서 폐기되던 전생과 이생의 우리 그리고 미래의 오염된 희망으로 살아가다가 결국 낙엽이 된 우리 우리는 함께 철새들을 보냈네 죽음 어린 날개로 대륙을 횡단하던 여행자 먼 곳으로 떠나가는 모든 것들에게 입맞춤을 하면 우리의 낡은 몸에는 총살당한 입김만이 어렸네 잘 있니? 우리는 낙과들이 곪아가던 가을 풀밭에서 뭉그러지는 육체 속으로 기어들어가 술 취하던 바람을 들었네 먼 시간 속에 시커멓게 앉아 있는 아버지 살해당한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이들을 고요하게 매장했던 바다의 안개 소리도 들었네 총소리였니? 아니, 돌고래가 새벽의 태양을 바라보며 출산과 죽음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니? 잘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춥겠다 덥겠다 아프겠다 배고프겠다 그들은 없는 이들 ..
이렇게 앉은 자세 있잖아. 이렇게 탁자 앞에 앉아 숨겨 두었던 팔을 꺼내 머리를 묻으니까 땅속에 숨은 기분이 된다. 땅속에는 깊은 줄거리가 있다고 하지. 실을 따라가듯 줄거리를 짚어가면 나는 제3의 인물이 된다고 하지. 줄거리의 끝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고 해. 그러니 내 옆의 의자에 앉아 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으면 좋겠다. 밤을 새워주었으면 좋겠다. 눈을 가리고 만든 물건들 속에는 내 손이 섞여 있을 거야. 눈을 가리고 그린 그림 속에서 나는 너를 더듬고 있을 거야. 신해욱, 『syzygy』, 문학과지성사, 2014, p. 126-127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p. 11 가장 첫 페이지에 있는 시이고 내가 아직까지도 아주 좋아하고 선명히 기억하는 시 중에 하나이다.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보면서 아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 라고 생각하는 저녁 그 저녁을 생각한다. 아마 그는 식탁에 혼자 앉아있었을 것이다.
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