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적 인간
멀리사 브로더, 오늘 너무 슬픔 본문
이 세상에서 위안을 찾을 방법은 많지 않다. 아무리 어둡고 역겨운 곳이라도 거기에 위안이 있다면 누려야 한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귀하가 나를 존재하게 하도록 허락합니다’라는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기들이란 부모가 자기만으로는 만족을 못해서 낳는 것 아닌가. 그러니, 부모님들, 우리가 실존적 구멍을 채우려 한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말아주시길. 여러분이 자기 구멍을 채우려다가 실패해서 생긴 게 바로 우리니까. 우리가 여기서 공허와 씨름하는 건 애초에 다 여러분 탓이다. (p.16)
당신이 외로운 상태로 낯선 데서 의식을 잃으면 또 다른 외로운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고 싶은 짓을 마음대로 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그걸 자유연애라고 부른다. (p.26)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 그러니까 나는 우리가 잘될 거라고 생각해: 사랑이야기.
욕조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개미 두 마리를 보니까 우리 둘이 생각났어: 사랑 이야기. (p.40)
너처럼 섹시한 애가 남들에게 인정 받고 싶어서 안달한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가 않지만, 하기야 아주 예민한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지.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는 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외부의 인정을 받아 봤자 전부 그 구멍들로 새어 나가 버려서 영영 만족할 수가 없고, 그러니까 결국은 다 내면의 문제일 뿐이고 외부의 인정은 아무리 받아도 소용이 없는 법이잖아 (하지만 인정받는 순간에는 기분이 무지 좋기는 해서, 뭐라고 할까, 신에게 화를 내고 싶어지기도 해. 당신이 나라는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놓지 않았느냐, 그러면 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는 법도 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한테 인정 받는 것도 남자한테 인정 받을 때나 인터넷에서 인정 받을 때처럼 기분 째지게 해달라, 남자한테나 인터넷으로 인정 받을 땐 꼭 대가를 치러야 하더라……): 사랑이야기. (p.45)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나를 나 자신에게서 구해줄 수 있지만, 나를 살아있는 상태에서 구해주지는 못한다. 그건 내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가끔 내 신은 나를 아끼는 사람들을 통해 말을 한다. 가끔 나는 너무 외롭다. (p.48)
나는 내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 존재를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통해 신을 느꼈다. 인간들 개개인은 나를 실망시켰지만, 인간 전체를 놓고 보면 나는 그들 사이에서 항상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내 신은 하늘에서 수직으로 기적을 내려주기 보다는 횡적으로 기적을 행하는 분이다. (p.79)
어쩌다 내 안에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내가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내 안 어딘가에 정말로 살고 싶어하는 나도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런 내가 존재한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지만, 굳이 증거를 찾을 필요는 없다. 아직 내가 살아있으니까. 살고 싶어하는 나 덕분에 나는 지금도 살아있다. (p.86)
왜 그렇게 맨날 이거 아니면 저거야? 아예 좋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예 나쁜 사람이거나, 왜 꼭 둘 중 하나여야 해? 네가 엄청 사랑스러우면서도 얼간이일 수도 있잖아. 끝내주게 멋있는 씹새끼일 수도 있고. 파괴적이면서 아름다운 사람일 수도 있고. (p.143)
'자기애'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한심하게 느껴진다. 자기애라는 개념은 현대 미국 문화가 만들어 낸, '건강한 케일 주스 다이어트법'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아닌가? "자기 자신을 안아 주세요. 당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요." 과연 그런가? (p.166)
누가 내게 연민을 표할 때는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고맙다고 인사하면 될 텐데, 내가 그러기를 두려워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타인에게서 동정을 받으면 내가 약한 사람이 될 것만 같고, 나는 약해지는 게 너무나 무섭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무섭다. 남들 눈에 내가 무너져가는 걸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 때문에 겁에 질리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당신이 나 때문에 겁에 질린다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겁에 질리지 않을 정도까지만 무너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정말로 모른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알고 싶기도 하다. 이제껏 오랜 세월 내 겉모습을 유지하면서 매일을 살아왔더니 이제는 정말 뒈지도록 피곤하다. 확 무너져버릴 수라도 있다면 얼마나 마음 편할까. 우주가 나를 돌봐주고 있으니 그냥 다 놔버려도 괜찮다는 믿음이 내게 있으면 좋겠다. 설령 우주가 나를 돌봐준다는 믿음이 없다고 해도─실제로도 없다─어쨌든 다 포기해버리면 속 시원할 것 같다. 나는 포기하는 걸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원하고 있는 모양이다. (p.168)
"재능이란 게 대단히 민감한 정신과 근본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런 정신 때문에 당신이 고통 받아야 한다면, 그럼에도 재능 있는 사람이 될 가치가 있는 걸까요?" (p.171)
참 희한한 일이다.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다니. 왜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살고, 그 사실을 모른 척 하면서 각자의 일을 하러 다닌다니. 다 같이 마주 보면서 "씨발, 이게 뭔 상황이지?" 이러고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p.220)
멀리사 브로더, 『오늘 너무 슬픔』, 김지현 옮김, 플레이타임, 2018
트위터에 발췌한 것을 블로그에 갈무리한다. 글자수 제한에 걸려 제대로 옮기지 못했던 것은 제대로 옮겼다.
때로 아주 격렬하게 솔직한 것은 누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된 신기한 경험의 독서였다.
희노애락을 다 겪기도 했다. 조금 급하게 발췌한 감이 없잖아 있어서, 후일에 다시 읽으며 발췌를 조금씩 추가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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