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적 인간
임현, 일인칭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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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들
부끄러웠던 일이 떠오르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이런 게 나름 도움이 되는 날도 있지 않겠나 기대하는데 예를 들어 낯선 곳에 고립되어 구조를 기다려야 할 때, 여기서 잠들면 다 끝장일 것 같은 그런 순간에, 살아남는 방법 하나를 내가 알고 있는 셈이다.
지나고 나면 자꾸 후회하는 것들이 생겨서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결국에는 돌고 돌아 지금의 내가 다시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전혀 다른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아마 그때도 여전히 비슷하게 후회하고 다른 쪽을 상상하며 아쉽고 아까운 것들, 놓치고 멀어진 것들에 대해 그리워하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로 존재했다가 그 중 가장 낮은 확률의 나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되지 못한 무수한 또다른 나를 떠올리다보면 그들도 어딘가에서 지금의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나로부터 한참 떨어진 뒤에도 내가 되지 못한 것을 두고 후회하고 그것으로 소설도 쓰고 그러는 걸까. 진짜 그렇다면 거기도 뭐, 별거 없네. 그 별것 아닌 것으로 나를 너무 낭비했다.
그럼에도 만약, 내가 나를 미리 알고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때도 나는 여전히 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지금의 나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대신 미래의 나는 평범하고 성실하게 늙어가면서 앓는 질병과 처방받은 약품의 성분으로 나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수도꼭지의 온도를 조절하느라 오랜 시간을 허비할 것이고, 매번 왼쪽부터 먼저 닳는 신발이라든지, 길 한가운데 버려진 양말 같은 것을 발견하며 이건 또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나 궁금해할 것이다. 어딘가 서로 닮은 것들을 바라보며 '너무 나 같네' 하고 적적해하겠지. 아니더라도 내게 없던 장면들을 상상하고 나랑 비슷한 누군가를 등장시키며 무언가를 써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쓴 거의 대부분의 것들도 이미 그렇게 쓰인 셈이다.
매번 그렇듯, 「그들의 이해관계」를 쓰는 동안에도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랐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혼자 텔레비전을 보거나 양치질을 하거나 현관의 흐트러진 신발들을 정리하다가 가까운 빈 벽에 대고 가만히 "너무 나 같다……" 중얼거려주기를 기대했다. 어쩌면 누구 한 사람 정도에게는 그런 순간이 몹시 필요하지 않을까. 그게 별다른 이유 없이 지금을 조금 견디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임현, 『2018 제 9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그들의 이해관계」, 문학동네, 2018, p. 125-127
작품집에 실린 임현 작가의 작품 「그들의 이해관계」도 좋았지만, 어쩐지 그 뒤의 작가노트가 더 끌렸다.
몇 문단만 발췌하려고 해도 도저히 발췌가 되지 않아 전문을 옮긴다. 오래 두고 읽고 싶은 작가의 글이다.
'너무 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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