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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적 인간

허수경,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본문

scrap

허수경,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이제나 2020. 6. 15. 22:43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잘 있니?

환각의 리사이클장에서 폐기되던 전생과 이생의 우리

그리고 미래의 오염된 희망으로 살아가다가 결국 낙엽이 된 우리

우리는 함께 철새들을 보냈네

죽음 어린 날개로 대륙을 횡단하던 여행자

먼 곳으로 떠나가는 모든 것들에게 입맞춤을 하면

우리의 낡은 몸에는 총살당한 입김만이 어렸네

 

잘 있니?
우리는 낙과들이 곪아가던 가을 풀밭에서

뭉그러지는 육체 속으로 기어들어가

술 취하던 바람을 들었네

먼 시간 속에 시커멓게 앉아 있는 아버지

살해당한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이들을

고요하게 매장했던 바다의 안개 소리도 들었네

 

총소리였니?

아니, 돌고래가 새벽의 태양을 바라보며 출산과 죽음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니?

 

잘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춥겠다 덥겠다 아프겠다 배고프겠다

그들은 없는 이들 보이지 않는 자연의 천사

나뭇잎이 떨어진다

눈썹 없이 의지 없이 기억 없이

 

사각의 틀에 갇혀버린 옆 마을의 나치 할아버지, 두줄무늬 늙은 나비, 지던 페르시아 퀸 장미, 위대한 가을의 국화, 휠체어에 앉아 있던 아이패드 5의 햇살 욕설, 오던 구급차와 가던 장의차, 토해놓은 사랑과 죽음으로도 돌이킬 수 없던 나날들, 고양이가 마시던 오후의 커피, 고요히 돌아와 창백한 별의 심장을 안아주던 어둠조차 사각의 관 속에 든 정물화가 되어가던 시간을 함께 보내던

나의 헌 창문

 

잘 있니?

환각의 리사이클장에서

영원히 폐기될 우리 사각의 영혼

밤거리를 걷다가 모르는 이들에게 얻어맞고도

울지 못해서 사각의 틀에서 튕겨져 나온 우리 영혼

산산이 부서진 영원의 사금파리 그 곤충의 눈

잘 있니?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p. 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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