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적 인간
이영주, 녹은 이후 본문
녹은 이후
눈사람이 녹고 있다
눈사람은 내색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부분은
에스키모인은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선다고 한다
마음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걷는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막대기를 꽂고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렇게 알 수 없는 곳에 도달해서
투명하게 되어 돌아온다고 하는데
나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왜 돌아오질 않죠
불 꺼진 방 안에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얼음처럼 기다렸는데
누군가가 돌아올까 봐
창문을 열어두고 갔는데
햇빛 아래
죽어가는 부분이 남아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발밑으로
엉망인 바닥으로
형태가 무너지는 눈사람
이렇게 귀향이 어려울 줄은 몰랐는데
흰 눈으로 사람을 만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런 걸 봄이라고 한다면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사, 2019, p.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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