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적 인간
이영주, 손님 본문
손님
외국인들이 앉아 있다. 이곳은 우리 집인데, 외국어만 쓸 수 있다. 나는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거실 안을 빙빙 돈다. 주전자에서 눈부신 연기가 올라와 흩어지고. 부드러운 음성. 깃털처럼 언어들이 떠다닌다. 부드러운 날개. 나는 손을 뻗어 흩날리는 소리를 잡아본다. 의미를 잃어버리면 이렇게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를 수 있을까. 서로에게 닿지 않는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창밖에서는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알 수 없는 말이 들려오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이 된다. 외국인들이 깃털을 털듯 서로의 어깨를 쓸어주고 있다. 더 깊은 의미를 잃어버리면 날개를 접고 우리 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갈 수 있을까. 창밖에는 폭설이 쏟아지고. 우리 집에서 홀로 집을 잃은 나는 외국인들처럼 차를 한잔 마시는데. 부드러운 연기. 부드러운 실종.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사, 2019, 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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