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적 인간
황혜경,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본문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핏줄들도 버리려고 할 때
비극의 끝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아서 센티멘털
누구에 의해서든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아닌 건 아니고 누추하지만
살면서 어떤 바닥이 제대로 절정이 되어줄 수 있겠는가
몇 번이나 응원이 더 필요한 계절을 지나올 때도
오늘의 바닥에 닿지는 못했다
여분을 믿는 것처럼 주머니를 뒤집었다
이르고 도달해 나를 다 즈려밟고 지나가야 할 길
누구에 의해서든 압축되어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사람을 위한 과일이라기보다는 새들을 위한 열매인 듯
하늘 바로 밑에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노란 모과를 보았을 때
주인인 줄 알고 살았던 나의 생生에
객客으로 초대받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하면서
불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또,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로부터 체온을 나눠 받는 혹한이다
다 쓰고 씌어지고 버려질 나는 아름답고
버려진 후에도 그 후에도
몸에 집중하던 사람이 정신을 처음 마주하는 낯선 순간처럼
정신에 몰두하던 사람이 몸을 처음 이해하던 그날처럼
제2의 암흑기 이후에
몇 겹의 어둠이 옴짝달싹 못 하게 더 에워싼 후에 꽁꽁 묶인 후에
가장 밝은 것으로 나를 반짝이다가 나는 아름다워질 거야
그리하여 이미 지나온 시인의 시에서
모르던 시간을 읽으면 나는 곧 후회로부터 긴 회한의 울음이 되어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황혜경,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문학과지성사, 2018, p. 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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