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s
Today
Total
Link
관리 메뉴

외부적 인간

황혜경,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본문

scrap

황혜경,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이제나 2018. 10. 6. 21:05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핏줄들도 버리려고 할 때

비극의 끝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아서 센티멘털

누구에 의해서든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아닌 건 아니고 누추하지만

살면서 어떤 바닥이 제대로 절정이 되어줄 수 있겠는가

몇 번이나 응원이 더 필요한 계절을 지나올 때도

오늘의 바닥에 닿지는 못했다

여분을 믿는 것처럼 주머니를 뒤집었다


이르고 도달해 나를 다 즈려밟고 지나가야 할 길

누구에 의해서든 압축되어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사람을 위한 과일이라기보다는 새들을 위한 열매인 듯

하늘 바로 밑에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노란 모과를 보았을 때

주인인 줄 알고 살았던 나의 생生에

객客으로 초대받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하면서

불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또,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로부터 체온을 나눠 받는 혹한이다


다 쓰고 씌어지고 버려질 나는 아름답고

버려진 후에도 그 후에도

몸에 집중하던 사람이 정신을 처음 마주하는 낯선 순간처럼

정신에 몰두하던 사람이 몸을 처음 이해하던 그날처럼

제2의 암흑기 이후에

몇 겹의 어둠이 옴짝달싹 못 하게 더 에워싼 후에 꽁꽁 묶인 후에

가장 밝은 것으로 나를 반짝이다가 나는 아름다워질 거야

그리하여 이미 지나온 시인의 시에서

모르던 시간을 읽으면 나는 곧 후회로부터 긴 회한의 울음이 되어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황혜경,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문학과지성사, 2018, p. 108-109

'scrap'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재연, 우주 바깥에서  (0) 2019.08.05
하재연, 밀크 캬라멜  (0) 2019.08.05
허수경, 목련  (0) 2018.10.06
나희덕, 육각(六角)의 방  (0) 2018.09.03
이제니, 발 없는 새  (0) 2018.08.29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