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적 인간
김중일, 커튼콜 본문
커튼콜
공연이 끝나자 나는 태어났다
끝도 없이 계속되던 공연이 끝나자 나는 태어났다. 처음이자, 슬픔이 없는 마지막 눈물 속으로 익살스러운 바람이 불었고, 나무들은 탬버린 수만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공연 중 검고 하얗고 뜨거운 꽃을 훔치다 데어 지문으로 남았다. 당신이 질투로 휘두른 칼날을 맨손으로 받은 흉터가 손금으로 남아, 지금껏 내 두 손을 꽁꽁 묶고 있다. 공연의 마지막, 밑도 끝도 의미도 없는 상징처럼 나를 낳은 엄마는 간신히 건져놓은 익사체처럼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다. 구석에 아무렇게나 뭉쳐놓은 더러운 커튼 같은 구름이 천천히 하늘 가득 펼쳐졌다.
줄거리도 없이 캄캄했던 공연의 막이 내려지자 나는 태어났다. 사람들은 혀를 차듯 웃었고, 양막을 뒤흔드는 최초의 박수갈채 그것은 우레와 폭우였다. 바다라는 일렁이는 커튼 뒤의 조난자처럼 두 손 흔들며, 우리는 차례대로 소개되었다. 당신은 꾸벅 인사한다. 다소 천천히, 다시 손 흔들며 인사한다. 다소 지루하게, 다 함께 운다. 야, 이 역적 새끼들아, 객석의 누군가 식칼을 들고 무대 위로 뛰어든다.
어차피 객석에는 목이 석자씩 빠진 귀신들만 가득 찼어. 죽느냐 사느냐 그런 건 애초부터 관심 없지. 사랑을 속삭이는 대사는 고리타분하고 교활해야 혀에 척척 감겼네. 커튼을 젖히면 언제나 거기 있는 것들. 얼굴 없는 짙은 화장 역겨운 향수 냄새. 목소리 없는 땀의 발성과 몸 없는 지루한 의상. 누런 먼지 같은 햇볕을 잔뜩 뒤집어쓰고 오늘도 커튼콜. 온종일 뛰어다녔더니 심장이 어느새 뚝 떨어진 석양처럼, 내 왼쪽 옆구리까지 흘러내려와 있다.
자줏빛 심장을 꺼내 던지니 새가 되었네. 나를 위해 울어주는 갸륵한 새 한 마리. 두 날개로 박수치며 훠이훠이. 눈물 젖은 손수건을 꺼내 던지니 시궁쥐가 되어 내 하나 남은 빵을 훔치고. 프라이팬 위의 올리브유처럼 무대 위를 멋대로 뛰어다니는 폭우 속의 산천초목들.
공연이 끝나자 나는 태어났다
달달 외웠던 대사는 한 줄 기억도 없고
내 바지 위에 당신이 쏟은 포도주와
구둣발에 짓밟힌 몇 조각 악취 나는 치즈의 밤
쥐도 새도 모르게 그리고 매일매일
초라하고도 성대했던 공연 저 끝에서부터
모욕과 용서의 까진 맨발로
커튼콜을 위해 일평생 나는
세수하고 밖으로 나간다
김중일, 『아무튼 씨 미안해요』, 창비시선, 2012, p. 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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