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ap

유희경, 단어

이제나 2018. 7. 1. 18:30

단어


빛이 떨어지고 빈 병이 있던 바닥에

거기 있다는 것을 본 것만 같은데


그저 그랬을 뿐 나는

흔적처럼 남아 있는 온기를 쓸어보았고

먼지처럼 작은 것들 묻어났다 알고 있었으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사라진 당신은

당신 아닌 것들만 남아 당신이 되었고


나는 아주 작고 아득한 단어를 날리고

세어본 것이다 쓸 수도 발음할 수도 없는

단어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것은

날아가버렸고 도저히 돌아올 수 없으니


유희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사, 2018, p. 54




오랜만에 페이지마다 발췌하고 싶은 것을 참은 시집.

하나만 발췌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시집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시인의 말도 남겨둔다.


시인의 말


나타나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는

우리의 옛 마음에게


2018년 3월

유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