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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빛에게

이제나 2018. 1. 12. 23:51

빛에게


빛이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빛은 왔어

균열이 드러났고

균열 속에서 빛은 괴로워했어

저로 인해 드러난 상처가

싫었던 거지

빛은 썩고 농한 것들만

찾아 다녔어

아무도 빛을 묶어둘 수 없고

아무도 그 몸부림 잠재울 수 없었어

지쳐 허기진 빛은

울다 잠든 것들의 눈에 침을 박고,

고여 있던 눈물을 빨아 먹었어

누구라도 대신해

울고 싶었던 거지,

아무도 그 잠 깨워줄 수 없고

아무도 그 목숨

거두어줄 수 없었으니까

언젠가 그 눈물 마르면

빛은 돌아가겠지,

아무도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다시는 죽지 않는 곳,

그런 곳에 빛이 있을까


이성복, 『래여래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p. 77-78




우연하게 다시 이 시집을 펼쳐볼 일이 있었는데 과거의 내가 마크를 해두었길래 여기에도 스크랩을 한다.

이 책은 2013년 7월 20일, 혜화에 있는 책방 이음에서 구입했다. 겉표지에 그렇게 써있었다.

멀지 않은 과거인데도 낯설구나.